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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용 감독이 78년에 발표한 <웃음소리>는 트로이카 1세대 여배우였던 남정임의 마지막 작품이다. 평탄하지 못한 결혼생활을 정리하고 컴백한 이후 옛 시절의 명성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는 그녀였지만, 자신의 데뷔 영화의 감독이었던 김수용 감독의 야심작(?)에서 남정임은 좋은 연기를 보여주고 있다. 이전에 그녀에게서 느껴졌던 깜찍함은 사라졌지만, 그녀의 얼굴엔 30대의 연륜이 묻어나고 있었고, 이런 점이 영화의 배역인 오학자에 잘 어울렸던 듯 싶었다. 30대의 윤정희가 보여주었던 화면 장악력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나름대로 안정된 연기는 영화와 잘 어울렸던 것 같다.

 

스타 남정임의 이야기로 시작하였지만 이 영화는 또한 김수용 감독의 야심이 진하게 묻어나는 영화이기도 했다. 영화의 변방이라고 할 수 있을 70년대의 한국에서 영화감독 김수용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을까? 한국에서 만큼은 일류로 인정받고 있었지만, 해외의 반응은 고사하고 국내 관객들의 신뢰조차 없었던 상황에서 김수용감독의 내면은 관객과 세계영화제 시장에서의 인정에 목말라하고 있지 않았을까? 그러므로 그는 스스로 영화적 완성도의 향상에 대한 욕망과 예술가로서의 자존심이 더 크지 않았을까 싶고, 이런 성향이 그의 영화세계에서 종종 튀어나오는 모더니즘 계열적 영화라고 불리는 작품들이 아닐까 싶다. 대표적으로 67년 작품 <안개>를 들 수 있겠지만 말이다.

  

최인훈의 동명소설을 영화화한 이 작품은 아마도 외화수입쿼터를 따기 위한 영화사의 전략으로 나온 작품일 가능성이 크지만, 틈새에 시장이 있다고 이런 쿼터용 작품들에서 감독들은 흥행과 제작자로부터 좀 자유로워져 다양한 예술적 실험을 해볼 기회를 가지게 된다. <웃음소리>도 이런 계열에 속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당연히 영화는 불친절하다. 인물들이 만들어내는 아기자기한 스토리가 없다. 오직 오학자(남정임)라는 여주인공의 내면을 불친절하게 따라갈 뿐이다. 그렇다고 그녀로부터 심오한 주제를 뽑아내려고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영화는 작은 이야기에 몰두한다. 호스테스인 오학자가 왜 자살을 결심했으며, 어떻게 그것을 극복해내는가가 유일한 이야기거리다. 그렇다고 그 원인에 어떤 심오한 장치를 만들어놓은 것도 아니다. 오직 사랑하는 남자에게 버림받았다는 정도로만 알려줄 뿐이다. 이런 스토리. 신파의 전형일수 있지만, <웃음소리>는 상황보다는 내면에 집중함으로써 신파의 덫을 비껴갔다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이제 남는 것은 스타일이다. 소설에서는 오학자의 내면을 묘사하는 필치가 중요할 것이고, 영화에서는 그것을 어떤 식으로 영상화했느냐가 중요해진다. 여기에 김수용감독의 목표가 있는 것 같다. 우선 이 영화에서 주목할 것은 여주인공의 대사가 극도로 절제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녀의 내면은 주위 인물들의 대사나 회상을 통하거나, 혹은 사운드나 미장센을 통해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관객 역시 80여분 동안 사건을 포개가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여기저기 걸어다니는 그녀를 따라다미녀 그녀가 보는 것만 보고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그녀가 자신을 버린 옛 애인 석우를 잊고 다시 웃음을 찾았을 때는 안도감마저 들게 된다. 

 

내가 생각하기에 김수용 감독은 유럽의 60년대 모더니즘 계열의 영화를 이상적인 영화예술의 형태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대표적으로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풍의 영화를 참고하면서 그 스스로 영화예술가로서의 욕망을 완성시키고 싶어하는 것 같다고 <웃음소리>를 보며 생각했다. 어쨌거나 국가와 민족이라는 거대담론이 개인을 억누르고 있던 70년대 후반, 김수용 감독은 <화려한 외출>, <웃음소리>등 개인을 스토리에 중심에 두면서 영화스타일을 실험하고 있다는 것이 작금의 영화팬으로서 무엇보다도 마음에 든다.


개봉 : 1978년 10월 5일 코리아극장

감독 : 김수용

출연 : 남정임, 이영하, 김만, 도금봉, 한은진, 이승현, 남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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